비즈니스제185호

삼성과 나이키가 줄 서는 두 회사

한쪽은 기계를 팔고, 한쪽은 기계를 숨겼어요

삼성과 나이키가 줄 서는 두 회사

들어가며

삼성전자 경영진은 극자외선 노광장비1를 한 대라도 더 확보하려고 네덜란드의 인구 4만 소도시로 날아가요. 나이키와 리바이스, 파타고니아는 옷을 만들 때 일본 도야마현 회사의 지퍼를 콕 집어 주문서에 적어 넣고요. 갑으로 불리는 회사들이 을 앞에 줄을 서는 셈이에요. 한국 언론이 ASML에 ‘슈퍼 을’이라는 별명을 붙인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두 회사가 그 자리에 오른 경로는 정반대예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둘의 공통점은 ‘제품을 만드는 기계’를 장악했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ASML은 그 기계를 팔았고 YKK는 끝까지 숨겼다는 거예요. 오늘은 이 정반대의 선택이 어떻게 같은 결과에 도달했는지, 그리고 그 갈림길에서 두 회사의 운명을 가른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뜯어볼게요.


기계를 숨긴 회사: 구로베의 성벽

숫자부터 볼게요. YKK는 2024 회계연도에 지퍼를 100억 개 팔았어요. 이어 붙이면 300만 km, 지구 80바퀴 분량이에요. 하버드비즈니스리뷰 추정으로 세계 지퍼 시장의 금액 기준 약 40%, 수량 기준 약 20%를 이 한 회사가 가져가요. NASA 우주복부터 청바지까지 쓰이는 곳도 다양해서, 일본에서만 지퍼 종류가 10만 가지를 넘어요.

비결로 흔히 품질이 꼽히는데, 저는 절반만 맞는 답이라고 봐요. 1934년 창업자 요시다 다다오가 세운 원칙은 ‘좋은 지퍼’가 아니라 ‘좋은 지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공정’이었거든요. YKK는 황동을 직접 제련하고, 폴리에스터 원사를 직접 뽑고, 지퍼 테이프를 직접 짜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모든 걸 수행하는 기계를 도야마현 구로베의 자체 시설에서 직접 설계하고 제작해요. 이 기계는 어떤 가격에도 외부에 팔지 않아요. 경쟁사가 지퍼는 베낄 수 있어도, 기계는 볼 수조차 없는 구조예요.

이 성벽의 위력은 미국 시장에서 증명됐어요. 1960년 뉴욕에 사무소를 낼 때만 해도 미국 1위 탈론이 지퍼 10개 중 7개를 쥐고 있었어요. 그런데 YKK가 자사 기계를 미국 의류 공장들에 리스로 들여놓기 시작하자 판이 뒤집혀요. 블룸버그에 따르면 기계 리스를 시작한 뒤 10년 만에 미국 법인 매출이 1억 달러 미만에서 약 4억 5,000만 달러로 뛰었고, 1980년대 후반에는 미국 1위 자리를 가져와요. 고객 공장 안에 내 기계가 돌아가는 순간, 지퍼 공급자를 바꾸는 일은 부자재 교체가 아니라 생산 라인 교체가 되거든요. 탈론의 점유율은 지금 한 자릿수예요.

이 기계가 만드는 품질이 왜 결정적인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고객도 있어요. 미군에 생존 장비를 납품하는 스위틀릭이에요. 이 회사의 드라이수트에서 지퍼는 물을 막는 최후의 방어선이라, 지퍼가 새는 순간 사람을 살리는 장비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장비로 바뀌어요. 그래서 스위틀릭은 미 공군용 구명조끼에 들어가는, 팽창할 때 스스로 터지며 열리는 퀵버스트 지퍼를 YKK와 공동 개발했어요. 지퍼는 옷값의 1%도 안 되는 부품이지만, 이런 구매자는 가격이 아니라 실패의 비용으로 계산해요. 이 시장에서는 저가 공세가 애초에 통하지 않아요.

중국의 저가 공세에 대한 대응도 같은 문법이에요. 1984년 창업한 푸젠성의 SBS는 YKK를 끌어내리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회사인데요. WSJ 영상에서 YKK 임원이 밝힌 대응책은 가격 인하가 아니라, 품질 저하 없이 원가 경쟁력 있는 지퍼를 뽑아내는 새 기계의 자체 개발이었어요. 제품이 아니라 기계로 응전하는 거예요. YKK가 지금도 비상장 회사로 남아 분기 실적 압박 없이 10년 단위의 설비 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도 이 문법을 떠받치고요.

물론 그림자도 있어요. 2007년 EU 집행위는 지퍼·파스너 가격 담합으로 7개 그룹에 총 3억 2,800만 유로를 부과했고, 그중 YKK 몫이 약 1억 5,000만 유로로 가장 컸어요. 잠긴 시장은 담합의 유혹도 크다는 기록이에요.

기계를 판 회사: 펠트호번의 그물

이제 반대편이에요. 1984년, 그러니까 YKK가 창업한 지 정확히 50년 되던 해에 네덜란드 펠트호번에서 30여 명이 ASML을 시작해요. 오늘날 이 회사는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지구에서 유일하게 만들고, 2025년 매출 327억 유로에 총이익률 52.8%를 기록했어요. 차세대 장비인 High-NA2는 한 대 가격이 5,000억 원 안팎으로 알려져 있고요. YKK가 도매가 몇십 원에서 몇백 원짜리 부품을 100억 개 팔아 왕이 됐다면, ASML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기계를 1년에 수십 대 팔아 왕이 된 셈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통념 하나를 정정할게요. ASML은 수직계열화의 화신이 아니에요. 오히려 정반대예요. 장비 부품의 80% 이상을 외주로 조달하고, 공급사가 5,000곳을 넘어요. EUV 한 대에 들어가는 부품이 약 10만 개, 출하할 때 컨테이너 40개와 화물기 3대가 움직여요. YKK가 모든 걸 성벽 안으로 들였다면, ASML은 거의 모든 걸 성 밖에 뒀어요.

대신 그물을 쳤어요. 광학계를 만드는 독일 차이스는 ASML의 유일한 공급자이자, 동시에 ASML을 유일한 고객으로 둬요. 25년 넘는 공동 개발로 서로가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해졌고, ASML은 차이스 반도체 부문 지분 24.9%까지 쥐고 있어요. 차이스가 만드는 EUV용 다층 거울은 표면을 사실상 원자 수준의 평탄도까지 연마한 물건이라, 지구상에 이걸 대신 만들어줄 회사 자체가 없거든요. 광원 회사 사이머는 2013년 아예 인수했고요. 부품은 사 오지만, 그 부품을 만들 수 있는 회사들을 자기 그물 안에 가둔 거예요. 성벽 대신 그물, 소유 대신 배타적 관계라는 잠금 방식이에요.

이 그물의 절정이 2012년이에요. EUV 개발 자금이 거대해지자 ASML은 고객들에게 손을 내밀어요. 인텔, TSMC, 삼성전자가 합계 지분 23%를 38억 5,000만 유로에 사들이고, 별도로 연구개발 자금 13억 8,000만 유로를 5년간 나눠 냈어요. 삼성만 해도 지분에 5억 유로, 연구비로 2억 7,600만 유로였어요. 그러면서도 이 지분은 전부 비의결권이었어요. 돈은 받되 경영에는 한 뼘도 자리를 내주지 않는 조건이었죠. 갑 세 곳이 을 한 곳의 연구개발비를 대준, 산업사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에요. 왜 냈을까요. 이 기계가 없으면 자기들의 미래가 없다는 걸 고객들이 먼저 알았기 때문이에요.

정리하면 이래요. YKK는 전부 직접 만들면서 기계만큼은 팔지 않았고, ASML은 거의 만들지 않으면서 기계 하나를 팔아요. 왜 이렇게 갈렸을까요.

성벽과 그물: 왜 정반대를 선택했을까

같은 질문에 두 회사가 반대로 답한 이유를, 저는 두 가지 축으로 봐요.

첫째, 기계가 곧 레시피인가예요. ASML의 장비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에요. 같은 EUV를 사도 TSMC와 후발 주자의 수율은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같은 장비로도 결과가 갈린다는 건, 진짜 레시피가 기계 밖에 있다는 뜻이에요. 기계를 팔아도 공정 노하우라는 레시피는 고객 몫으로 남으니, 팔아서 왕이 될 수 있어요. 반면 YKK의 지퍼 기계는 그 자체가 레시피에 가까워요. 기계를 팔면 수십 년 치 공정 지식이 통째로 넘어가요. 그러니 숨기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어요.

둘째, 기계 층의 시장 크기예요. 반도체 장비 시장은 그 자체로 연 1,000억 달러가 넘는 규모라, 장비만 팔아도 세계적 기업이 성립해요. 그런데 ‘지퍼 제조 장비 시장’은 독립 시장으로는 너무 작아요. 좋은 지퍼 기계를 돈으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 그 기계로 직접 지퍼 100억 개를 찍는 것뿐이었던 거예요.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나 도쿄일렉트론 같은 장비 전문 기업이 반도체에는 존재하고 지퍼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거고요.

이 선택은 지리적 운명까지 갈랐어요. 기계를 쥔 YKK는 같은 품질의 공장을 69개국에 복제할 수 있었고, 팔 곳에서 만든다는 원칙이 관세의 시대에 방패가 됐어요. 미군 납품 요건인 베리 수정조항3을 조지아 공장으로 통과하는 식이에요. 반면 기계 자체가 제품인 ASML은 펠트호번 한 곳에 조립을 집중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미중 수출통제의 정중앙에 서게 됐어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정반대의 리스크 프로필이에요.

YKK두 왕은 지금 모두 한국 땅에 발을 딛고 있기도 해요. YKK한국은 서울 방배동에 본사, 평택에 공장을 두고 국내 의류·가방 업계에 지퍼를 공급해요. ASML은 2,400억 원을 들인 화성캠퍼스를 지난해 준공했는데, 핵심 시설이 노광장비 부품을 수리해 되살리는 재제조센터예요. 여기서 쓰는 국산 부품 비중을 10%에서 5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도 밝혔고요. 기계를 판 회사조차 기계의 수명 관리만큼은 고객 곁에 두려는 거예요. 한편 YKK는 2023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글로벌 영업 본부를 일본 밖인 베트남으로 옮겼어요. 생산의 90%가 이미 일본 밖에서 이뤄지거든요. 성벽의 회사는 성벽을 세계에 복제하고, 그물의 회사는 그물의 끝단을 고객 옆에 심는 식으로, 지리 전략까지 각자의 문법을 따라가요.


오스왈드의 시선

GTM 전략 컨설팅에서 제품 정의 워크숍을 진행할 때 제가 꼭 던지는 질문이 있어요. “우리 회사가 만드는 것 중에, 팔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대부분 처음엔 질문 자체를 낯설어해요. 만드는 것과 파는 것을 같은 목록으로 관리해 왔으니까요. 오늘 두 회사는 그 목록을 분리한 회사들이에요. 무엇을 팔지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설계하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죠. 갑을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명함의 위계가 아니라 대체 가능성의 위계가 진짜 서열이고, 두 회사는 자신을 대체 불가능한 층에 가져다 놓는 설계를 했을 뿐이에요.

판별 기준도 이 사례에서 뽑을 수 있어요. 내 역량 가운데 복제가 가장 어려운 층을 찾고, 그 층의 독립 시장이 성립하는지 보는 거예요. 시장이 충분히 크면 ASML처럼 그 층을 제품으로 승격시키고, 시장이 없으면 YKK처럼 봉인한 채 최종재로만 수익화하는 거죠. 고객사가 요구하는 대로 다 만들어주는 관행에 익숙한 한국 소부장 기업이라면, 어떤 도면은 넘기더라도 어떤 지그와 설비는 절대 넘기지 말아야 할지 이 기준으로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잠금은 공짜가 아니에요. YKK의 담합 과징금은 잠긴 시장의 유혹을, ASML의 수출통제 리스크는 잠긴 지리의 취약성을 보여줘요. 무엇을 잠글지 정하는 일은, 어떤 리스크를 안을지 정하는 일이기도 해요.


마치며

정리하면 이래요. 첫째, 두 회사의 힘은 제품이 아니라 ‘제품을 만드는 기계’를 장악한 데서 나와요. 둘째, 잠그는 방식은 성벽(전부 내재화)과 그물(외주 후 봉인)로 정반대지만, 기계 층을 남에게 내주지 않는다는 원리는 같아요. 셋째, 그래서 던질 질문은 “우리 제품이 얼마나 좋은가”가 아니라 “우리 가치사슬의 기계 층을 누가 쥐고 있는가”예요.

구독자님이 몸담은 업에서 ‘기계를 쥔 회사’는 어디인가요? 반대로 구독자님 회사가 절대 팔지 않는 것, 혹은 팔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댓글로 들려주세요. 흥미로운 사례는 다음 호에서 함께 뜯어볼게요.


💬 우리 업계의 ‘숨긴 기계’ 사례를 댓글로 들려주세요. 다음 호에 반영해볼게요. 📨 부품·장비·B2B 쪽에서 일하는 동료가 있다면 이 글을 전달해 주세요.


함께 읽으면 좋은 지난 호


📎 참고자료 & 더 읽기

핵심 출처

  • YKK, “YKK Surpasses 10 Billion Annual Global Zipper Unit Sales in FY2024”, 2025. 링크 ··· 100억 개, 지구 80바퀴 수치의 원출처예요.
  • WSJ, “YKK Sells 10 Billion Zippers a Year. How Did It Get So Big?” (영상), 2026. 링크 ··· 오늘 글의 출발점이 된 영상이에요. 기계 내재화와 미군 납품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 Bloomberg Businessweek, “How the World’s Largest Zipper Maker Is Weathering the Tariffs Era”, 2025. 링크 ··· 기계 리스 후 매출 4.5배 디테일과 구로베의 비밀 시설 이야기가 여기 있어요.
  • ASML, “2025 Fourth Quarter and Full-Year Results”, 2026. 링크 ··· 매출 327억 유로, 총이익률 52.8%의 원출처예요.
  • ASML, “Samsung joins ASML’s Customer Co-Investment Program”, 2012. 링크 ··· 갑 셋이 을의 연구비를 댄 2012년 장면의 1차 출처예요.
  • European Commission, “Antitrust: Commission fines members of fasteners cartels over EUR 328 million”, 2007. ··· YKK의 1억 5,000만 유로 과징금 원자료예요. 지배력의 그림자까지 봐야 균형이 맞아요.

배경 지식

  • The Fashion Law, “The Humble Zipper is at the Center of an Almost $20 Billion Global Battle”, 2020. 링크 ··· 탈론의 몰락부터 SBS의 도전까지, 지퍼 산업사를 한 편으로 훑기 좋아요.
  • 디일렉, “ASML, 2400억 투입 화성 클러스터 구축”, 2022. 링크 ··· ASML 화성캠퍼스와 재제조 부품 국산화 계획(10%→50%)을 다룬 기사예요.

📝 용어 설명

안광섭 프로필 일러스트

필자 안광섭은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이자 OBF(Oswarld Boutique Consulting Firm) 리드 컨설턴트이다. 대학에서 경영데이터 관리, 비즈니스 애널리틱스 등 통계 및 데이터 분석을 가르치는 한편, 현장에서는 GTM 전략과 인공지능 전략 컨설팅을 이끌며 기술과 비즈니스의 접점을 설계하고 있다. AI 대화 시스템의 기억 아키텍처(HEMA) 연구로 학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매일 글로벌 AI 논문을 큐레이션하는 Daily Arxiv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기술경영전문대 석사과정와 KMBA을 졸업했다. 지은 책으로 《생각을 맡기는 사람들: 호모 브레인리스》가 있다.

각주

  1.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빛으로 웨이퍼에 회로를 그리는 장비 중 가장 미세한 공정용이에요. 파장이 짧을수록 가는 선을 그릴 수 있는데, EUV는 그 극한이라 최첨단 칩 생산에 필수예요.

  2. High-NA: EUV의 차세대 버전이에요. 렌즈가 빛을 모으는 능력(개구수)을 키워 더 미세한 회로를 그려요. 카메라로 치면 조리개를 크게 키운 셈이에요.

  3. 베리 수정조항(Berry Amendment): 미군이 조달하는 의류·섬유 제품 등은 미국산이어야 한다는 규정이에요. 미군에 납품하려면 공급망이 미국 안에 있어야 해요.

SEND A COFFEE

이 관점이 좋았다면, 다음 글에 커피 한 잔

오스왈드에게 커피와 함께 짧은 쪽지를 보내주세요. 응원은 다음 취재와 집필에 보탭니다.

FOR OSWARLD

커피와 쪽지 보내기

“삼성과 나이키가 줄 서는 두 회사”을 읽고 떠오른 말을 남겨주세요. 메뉴 이름만큼의 응원금과 함께 전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