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제183호

샌디스크가 받아낸 4년짜리 각서

고객이 먼저 165억 달러를 보증했어요

샌디스크가 받아낸 4년짜리 각서

들어가며

작년에 사둔 NAS 하드디스크를 하나 더 채우려다가 가격을 보고 창을 닫은 적이 있어요. 올해 초부터 하드디스크와 SSD 값이 계속 오르고 있거든요. 이유는 다들 아는 그거예요. AI 데이터센터가 시장에 나온 물량을 통째로 사가고 있어요.

여기까지는 이미 여러 번 나온 이야기예요. 그런데 어제(8월 5일) 웨스턴디지털과 샌디스크가 같은 날 실적을 발표했는데, 그 안에 훨씬 이상한 대목이 하나 있었어요. 수요가 이렇게 폭발하는데 두 회사 모두 공장을 더 짓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고객들은 그걸 알면서도 4년치 계약서에 사인하고 있고요.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지금 벌어지는 일은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아니에요. 40년간 반복돼온 메모리 사이클 자체를 계약서로 덮어버리려는 시도예요. 그리고 시장은 아직 그걸 안 믿고 있어요.


어제 나온 숫자들

먼저 실적부터요. 두 회사 다 기록적이었어요.

웨스턴디지털은 분기 매출 37.5억 달러로 전년 대비 44% 늘었고, 총마진이 54.4%였어요. 1년 만에 13.1%포인트가 올라간 거예요. EPS는 3.56달러로 두 배가 됐고요.

샌디스크는 더 극적이에요. 분기 매출 89.7억 달러, 전년 대비 372% 증가. 총마진 84.6%. 이 숫자가 얼마나 비정상적이냐면, 낸드 회사가 소프트웨어 회사 수준의 마진을 찍었다는 뜻이에요. 그중에서도 데이터센터 매출이 29.8억 달러로 전년 대비 1,298% 늘었어요. 공급 비트1 기준으로 데이터센터 비중이 1년 만에 12%에서 38%로 뛰었고요.

여기서 짚고 갈 게 하나 있어요. 원래 하드디스크와 낸드는 서로를 잡아먹는 관계였어요. SSD가 싸지면 하드디스크가 죽는다는 게 20년째 반복된 예언이었죠. 그런데 이번 분기엔 둘 다 사상 최대예요. 웨스턴디지털의 니어라인2 엑사바이트 출하가 23% 늘고, 동시에 샌디스크의 데이터센터 SSD가 13배가 됐어요.

이건 대체가 아니라 증축이라는 뜻이에요. AI가 스토리지 시장을 나눠 먹은 게 아니라 위에 한 층을 더 얹었어요. 학습은 고성능 플래시가, 추론은 대용량 엔터프라이즈 SSD가 받고, 계속 쌓이는 원본 데이터는 여전히 하드디스크가 받아요. 웨스턴디지털 경영진이 콜에서 강조한 대로,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의 약 80%는 아직 하드디스크에 들어 있어요.

그런데 이 좋은 실적 발표 뒤에 웨스턴디지털 주가는 약 16% 빠졌어요. 샌디스크도 최근 하루 13% 하락한 적이 있고요. 이 대목이 오늘 이야기의 진짜 시작이에요.


939억 달러짜리 각서

샌디스크가 이번에 공개한 계약 구조를 저는 NBM이라고 부르는 게 좀 아깝다고 생각해요. 회사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New Business Model)‘이라고 부르는데, 실제 내용은 각서에 가깝거든요.3

숫자를 나열해볼게요.

  • 데이터센터와 OEM을 아우르는 고객 8곳과 체결
  • 가중평균 계약기간 4년 이상 (통상적인 메모리 장기공급계약은 1년 안팎이에요)
  • 하한가 기준 최소 계약 매출 939억 달러
  • 그 하한가로 팔아도 총마진 80% 이상
  • 계약 잔고(RPO) 910억 달러
  • 그리고 165억 달러의 재무적 보증
  • FY27 출하 비트의 약 50%, FY28의 약 66%가 이미 약정됨

939억 달러는 원화로 약 130조 원이에요. 그런데 이건 최대치가 아니라 최소치예요. 하한가로만 팔았을 때 들어오는 돈이고, 시장 가격이 그 위에 있으면 실제 매출은 더 커져요. 계약이 보통 상단을 정하는 물건이라는 걸 생각하면 방향이 반대죠.

그리고 마지막 두 개가 핵심이에요. 165억 달러, 그러니까 23조 원 규모의 재무적 보증이 있다는 건, 고객이 “이만큼 사겠다”고 말만 한 게 아니라 돈을 걸었다는 뜻이에요. 샌디스크 CFO 루이스 비소소가 JP모건과의 미팅에서 이 구조를 이렇게 설명했어요. 고객이 계약을 파기하면 사전에 정해진 기준에 따라 자금이 샌디스크로, 또는 제3의 금융기관을 거쳐 곧바로 흘러온다고요.

“소송도, 협의도 없어요. 그냥 아주 단순한 절차예요.”

웨스턴디지털 쪽도 결이 같아요. 경영진은 고객들이 2029년, 2030년, 2031년까지 이어지는 장기공급계약을 먼저 원하고 있다고 밝혔어요. 5년 뒤에 쓸 하드디스크를 지금 예약한다는 이야기예요.

메모리 산업에서 이건 정말 낯선 장면이에요. 이 산업의 기본 문법은 공급자가 을이었거든요. 호황이 오면 다 같이 증설하고, 물량이 쏟아지면 가격이 무너지고, 고객은 그 바닥에서 싸게 담는 게 40년간의 리듬이었어요. 실제로 2023년 낸드 시장은 전년 대비 40% 줄어 367억 달러까지 내려앉았고, 2025년 초에도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다시 꺾였어요. 불과 1년 반 전 일이에요.

비소소가 짚은 구조적 원인이 정확해요. 공급자는 10년을 보고 투자하는데, 낸드 가격은 분기마다 정산됐어요. 이 시간 불일치가 사이클의 정체였어요. 지금 계약이 하려는 건 그 불일치를 없애는 거고요.


그런데 공장은 안 짓겠대요

여기가 제일 흥미로운 부분이에요.

수요 전망은 이렇습니다. 샌디스크 내부 추정으로 낸드 시장은 올해 3,000억 달러를 넘고, 내년엔 약 5,000억 달러로 갑니다. 1년에 67% 커진다는 뜻이에요. 웨스턴디지털은 엑사바이트 수요가 연 25% 이상 늘어난다고 보고 있고요.

보통 이런 전망이 나오면 다음 문장은 증설이에요. 그런데 두 회사 다 반대로 말했어요.

웨스턴디지털은 유닛 증설 없이 고용량·고밀도 전환만으로 대응하겠다고 했어요. 40TB ePMR을 이번 분기부터 올리고, 44TB HAMR4은 내년 상반기, 50TB는 내년 하반기예요. 드라이브 대수는 안 늘리고 한 대에 담기는 용량만 키우겠다는 거죠.

샌디스크는 한 발 더 나갔어요. 계약 물량의 공급 신뢰성을 지키려고 FY27에 재고를 의도적으로 더 쌓겠다고 했는데, 그 결과 판매 가능한 비트 성장률이 10%대 중반으로 내려간대요. 회사가 스스로 밝힌 장기 목표 범위(10%대 중반~후반)의 하단이에요. 수요가 67% 늘어난다는 시장에서 공급은 15% 남짓 늘리겠다는 이야기예요.

이걸 규율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다르게 부를 수도 있어요. 저는 양쪽 다 맞다고 봐요. 2023년 폭락을 겪은 경영진이 학습한 결과이기도 하고, 소수 공급자가 남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기도 해요. 낸드는 사실상 5~6개 회사, 니어라인 하드디스크는 사실상 3개 회사가 전부거든요.

다만 반론도 정직하게 적어둘게요. 메타를 비롯한 일부 하이퍼스케일러와 QLC5 진영은 “이제 대용량 SSD가 하드디스크를 대체할 때”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전력과 운영비까지 넣은 총소유비용에서 QLC가 이미 앞선다는 논리인데, 반대로 QLC의 쓰기 수명 한계와 낸드 자체의 공급 부족이 발목을 잡는다는 반박도 있어요. 이 논쟁은 아직 안 끝났어요.


오스왈드의 시선

구독자님, 그럼 왜 주가는 빠졌을까요.

계산을 하나 해볼게요. 씨티가 샌디스크에 제시한 목표주가는 CY27 예상 EPS의 9배예요. 그 배수를 역산하면 씨티가 보는 내년 EPS는 주당 약 233달러예요. 그런데 현재 주가로 나눠보면 내년 예상 이익의 6배도 안 되는 값이 나와요.

이게 무슨 뜻이냐면, 시장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내년 이익은 인정한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엔 무너질 거다.”

한쪽엔 4년짜리 계약서와 165억 달러 보증이 있고, 다른 쪽엔 6배도 안 되는 배수가 있어요. 둘 중 하나는 틀렸어요.

저는 시장 쪽이 틀렸다고 봐요. 정확히는, 시장이 옛날 지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요. 참고로 저는 철저하게 메모리라는 건 2년 아니 길게봐도 4년짜리 소모품으로 봐요.

GTM 전략을 짜면서 여러 산업의 공급계약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거기서 반복해서 확인한 패턴이 하나 있어요. 고객이 장기계약을 먼저 요구하는 순간, 그 시장의 협상력은 이미 넘어간 뒤예요. 보통 장기계약은 공급자가 매출 안정성을 위해 애원하듯 제안하는 물건이거든요. 고객이 먼저 4년을 걸고 위약 조항까지 스스로 설계해오는 건 다른 이야기예요. 그건 “물량을 못 구할까 봐 무섭다”는 신호예요.

그리고 이 신호는 보통 분기 단위로 사라지지 않아요. 제 경험상 이런 구조가 한 번 형성되면 5년 안팎은 유지돼요. 계약 자체가 그 기간을 물리적으로 잠그기 때문이에요.

물론 제가 틀릴 수도 있어요. 계약이 아무리 길어도 하한가는 하한가고, 고객이 위약금을 물고 나가는 게 더 싸지는 순간이 오면 각서는 종이가 돼요. 2027년 말이면 상황이 달라질 거라는 전망도 있고요. 다만 저는 이번 분기의 진짜 뉴스가 마진이나 매출이 아니라 계약의 형태였다고 생각해요. 숫자는 사이클과 함께 오르내리지만, 계약 구조가 바뀌는 건 산업의 문법이 바뀌는 일이거든요.

⚠️ 참고로 이 글은 산업 구조 분석이에요. 특정 종목에 대한 투자 권유가 아니고, 인용한 목표주가나 배수는 ‘시장이 이 산업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읽는 지표로만 썼어요.


마치며

세 줄로 정리할게요.

첫째, 하드디스크와 낸드가 동시에 사상 최대를 찍었어요. AI는 스토리지를 대체한 게 아니라 층을 하나 더 쌓았어요.

둘째, 샌디스크는 4년 평균의 계약 8건과 165억 달러 보증을 받아냈고, 웨스턴디지털은 2031년까지의 계약을 받고 있어요. 40년간 분기마다 정산되던 산업이 처음으로 사이클을 계약서로 묶으려 하고 있어요.

셋째, 그런데 두 회사 다 증설은 거부했어요. 이 청구서는 결국 클라우드 원가를 거쳐 AI 서비스 가격으로, 그리고 제 NAS 견적서로 내려와요. “AI는 시간이 지나면 싸진다”는 통념의 정반대편에 스토리지가 서 있어요.

process다음 갈림길은 다음 주예요. 8월 13일 목요일 밤(한국시간), 샌디스크가 인베스터 데이를 엽니다. 여기서 계약 구조와 목표 재무모델이 얼마나 더 구체적으로 나오느냐가, 오늘 이야기가 맞는지 틀리는지의 1차 채점표가 될 거예요. 저도 보고 나서 정리해 볼게요.

혹시 회사에서 클라우드 스토리지 비용이나 서버 견적이 올해 눈에 띄게 오른 걸 체감하셨다면, 어느 항목에서 얼마나 뛰었는지 댓글로 들려주세요. 반대로 아직 아무 변화가 없다면 그것도 중요한 데이터예요. 인프라 계약 주기에 따라 체감 시점이 다를 텐데, 사례가 모이면 ‘가격 인상이 실제로 사용자에게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주제로 후속 호를 써볼게요.


💬 클라우드·서버 비용, 올해 어느 항목이 얼마나 올랐나요? 댓글로 들려주세요. 📨 인프라나 데이터 비용을 관리하는 동료가 있다면 이 글을 전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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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안광섭은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이자 OBF(Oswarld Boutique Consulting Firm) 리드 컨설턴트이다. 대학에서 경영데이터 관리, 비즈니스 애널리틱스 등 통계 및 데이터 분석을 가르치는 한편, 현장에서는 GTM 전략과 인공지능 전략 컨설팅을 이끌며 기술과 비즈니스의 접점을 설계하고 있다. AI 대화 시스템의 기억 아키텍처(HEMA) 연구로 학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매일 글로벌 AI 논문을 큐레이션하는 Daily Arxiv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기술경영전문대 석사과정와 KMBA을 졸업했다. 지은 책으로 《생각을 맡기는 사람들: 호모 브레인리스》가 있다.

각주

  1. 비트(bit) 기준 출하량: 메모리 업계는 판매량을 개수나 금액이 아니라 저장된 정보량(비트)으로 세요. 같은 개수를 팔아도 용량이 커지면 비트 출하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이게 실제 물량을 보는 가장 정확한 단위예요.

  2. 니어라인(nearline) 하드디스크: 자주 꺼내 쓰진 않지만 필요할 때 바로 접근해야 하는 데이터를 담는 대용량 하드디스크예요. 데이터센터에서 원본 데이터와 백업을 쌓아두는 층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3. NBM / 장기공급계약(LTA): 고객이 향후 몇 년간 살 물량과 가격 범위를 미리 정해두는 계약이에요. 보통 하한가(floor)와 상한가(ceiling)를 정해서, 가격이 아무리 떨어져도 하한가 아래로는 안 내려가게 설계해요.

  4. HAMR (열보조 자기기록): 하드디스크 표면을 레이저로 순간 가열해서 더 촘촘하게 데이터를 기록하는 기술이에요. 같은 크기의 디스크에 더 많이 담을 수 있어서, 공장을 늘리지 않고 용량을 키우는 핵심 수단이에요.

  5. QLC: 낸드 셀 하나에 4비트를 저장하는 방식이에요. 같은 면적에 더 많이 담을 수 있어 싸지지만, 쓰기 수명이 짧아서 자주 고쳐 쓰는 데이터에는 잘 안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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